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by 아리난


나는 알랭 드 보통을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에 베스트로 꼽는다. 이분 특유의 엉뚱한 비유와 차갑지 않고 귀여운 시니컬함, 어울릴것같지 않은 순간에서 의외의 어울림을 찾아내는 능력같은것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왠지 날 신나게한다.

일이 한탕 끝나고나서 입금이 될때면 그동안의 긴축정책을 청산하고-_;; 뭔가 그동안 사고 싶었던것들을 하나둘씩 지르게되는데, 그중 하나는 한국에 출판되어있는 알랭드보통의 책을 모두 사보는것이었고, 그래서 아마 작년말에 대량의 책을 구입했던것 같다. 근데 막상 쟁여놓고 있으니까 언제든지 내키면 읽을수 있단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져서 안읽게 된다;;;;


암튼 그래서 보통의 책중에 몇권의 책을 돌려가며 읽고있는데, 그중에 가장 신간.

내가 그동안 읽은 보통의 책들은.. 그가 젊은 시절에 쓴 책들이 많아서 현재 그의 나이와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데, 이건 쨋든 신간이니까 그와는 거리가 가장 가깝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읽다보니 뭔가 조금 혼란스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보통 특유의 느낌과는 다르게 약간은 체념한듯 덤덤한, 그리고 약간은 서글프게 포기한듯하다는 어떤 느낌들이 읽는 내내 텍스트 위에 둥둥 떠다녔다. 약간 이와 비슷한 느낌이 kiss & Tell 에서도 느껴지긴 했는데 그때는 조금 쓸쓸하다는 느낌이여서 이거랑은 또 틀린것 같고.. 내가 좋아하는건 젊은 시절의 보통인가?! 싶기도 하고 아님 이분도 요새 좀 혼란스러운신건가 싶기도 하고.. 번역탓인가? =ㅅ=

얼마전 내가 한참 일이나 직업같은것에 대해서 심난해 하고 있었던 타이밍에 이 책을 붙잡고 읽었는데, 왠지 심난해하는듯한 작가와 자꾸 싱크로가 되어서 더 마음이 흐트러졌었다 -_;;;; 전에 읽었던 책들과 다르게 일단 명랑한 부분은 많지 않다. 그리고 뭔가, 글을 읽는 호흡이 매끄럽지 못하고 끊기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뭔가 그런 점들이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해주어서 싱크로율이 높아진건지, 한번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뒤적뒤적거리고 있다.

그래도 역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그의 독특한 표현들은 훌륭하다.


그는 송전 엔지니어들은 아무리 미로같은 전기적 시나리오라도 명료하게 전달할수 있는 매우 정확하고 효율적이고 보편적인 어휘를 마음대로 다루는 특별한 축복을 받았기때문에, 이란에서 칠레에 이르기까지 Ψ는 전기의 흐름, η는 투자율, ρ는 투자도, α는 저항의 온도 계수를 가르킨다고 설명했다.

나는 감명을 받았다. 그것과 비교하면 일상 언어는 무척이나 궁핍해보였기 때문이다 일상 언어에서는 전기 네트워크와 관련된 것보다 훨씬 더 기본적인 의미를 전달할때도 엄청나게 많은 단어들을 불안정하게 잔뜩 쌓아올려야 했다. 나도 모르게 나머지 인류도 엔지니어의 예를 따라 잘 잡히지 않고 쉽게 증발해버리는 고통스러운 심리 상태를 논쟁의 여지없이 지시할수 있는 일련의 상징에 동의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 부호가 있으면 우리가 침울해지는 일도 드물어지고 외로움도 덜 수 있을것 같았다. 말없이 몇가지 방정식만 빨리 교환하고 나면 논쟁이 해소될것 같았다.

엔지니어의 간결성이 적용되어 이익을 볼 수 있는 감정의 예는 부족하지 않은 것 같았다. 가령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이따금씩 생기는 이상한 욕망을 우아하게 암시할 수 있는 기호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이것을 a라고 해두자). 자신의 병을 두고 친지가 자신보다 더 걱정하는 것처럼 보일 때 느끼는 짜증을 b라고 할까. 또 가끔 삶의 다양한 시기가 동시에 공존하는 듯한, 그래서 어렸을 때 살던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하기 짝이 없는 느낌은 c라고 해보자.

이런 표기 체계를 갖고 있다면 일요일 오후면 느끼곤 하는 그 제멋대로 둥둥 떠다니는 노스탤지어와 불안을 압축해서 모호한 구석이 전혀 없는 하나의 명로한 수식(a+b+c*2)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아무 도움 안 되는 투덜거림만 늘어놓기 십상인 주위의 친구들한테서도 공감과 동정을 끌어낼 수 있을 텐데.


<- 이책에서 가장 무릎탁 부분 ㅎㅎ


현대의 일하는 세계의 가장 주목할만한 특징은 결국 내적인 것으로서 우리 정신의 한 측면을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널리 퍼진 믿음이다. 일을 중심에 둔것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이 형벌이나 속죄 이상의 어떤것일수도 있다고 주장한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처음이다. 경제적인 필요가 없어도 일은 구해야 한다고 암시하는 것도 우리 사회가 처음이다. 직업 선택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로 사귀게 된 사람에게도 어디 출신이냐, 부모가 누구냐 묻는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길로 나아가려면 보수를 받는 일자리라는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가정이 깔려있는것이다.

그러나 늘 이랬던것은 아니다.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족과 보수를 받는 자리는 구조적으로 양립할수 없다고 말했으며, 이런 태도는 그 이후 2천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 그리스 철학자에게 경제적 요구는 사람을 노예나 동물과 같은 수준에 놓는 것이었다. 육체노동은 정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심리적 기형을 낳는다고 보았다. 시민은 노동하지 않고 소득을 얻어 여가를 즐기는 생활을 할때만 음악과 철학이 주는 높은 수준의 즐거움을 누릴수 있었다.

....

결과적으로 18세기의 부르주아 사상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식을 뒤집은 셈이다. 이 그리스 철학자가 여가와 동일시했던 만족은 이제 일의 영역으로 옮겨갔으며, 아무런 경제적 보답이 없는 일은 모든 의미가 빠져나가고 퇴폐적인 딜레탕트의 우연적인 관심이나 받는 대상이 되었다.

일에 대한 태도의 이런 진화는 흥미롭게도 사랑에 관한 관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영역에서도 18세기 부르주아지는 즐길수 있는 것과 필요한 것을 한데 묶었다. 그들은 성적인 정열과 가족 단위에서 자식을 기르는 실제적인 요구 사이에도 본래 갈등이 없으며, 따라서 결혼 안에도 로맨스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보수를 받는 일에서도 즐거움을 느낄수 있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때까지 귀족은 비관적으로 -또는 어쩌면 현실적으로- 쾌락을 연애와 취미라는 부차적 영역에 한정시켰지만, 유럽의 부르주아지는 이 쾌락을 결혼과 일로 가져오는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으며, 우리 또한 이런 흐름을 이어받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섣불리 묻지 못했거나 일부러 묻지 않았던 질문중에 하나는, 무엇을 하고있는지 직업이 무엇인지 같은것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부동산을 하고있어요 라고 했다면, 나는 아마 어느정도 부유하지만 실리에 밝고 야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거라는걸 안다. 목사라고 했으면 다신 연락하지 않았을것이고, 요리사라고 했다면 아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을거라는걸 안다.

내가 누군가에게 스스로가 인정할수 없는 이미지로 인식되는것은 싫지만, 나역시도 그런 특정 직업에 대한 보편적인 이미지들로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떤 종류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를 얘기하는것도 타인에게 묻는것도 싫었다. 피할수 없는 과정이긴 하지만..

'회사'에 소속된다는건 이 편견들이 더 강해지기 마련이라 안정된 회사생활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라 일컫는 반백수의 생활을 하면서도 뭐가 그리 조타고;; 그리도 마음이 자유로웠던건지도 모르겠다-_;;;; 이런 나의 마음은, 아마 직업으로 무언가를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엇보다 나 자신이 스스로를 그런 기준으로 마음에 들어하고 있지 않다는 역설일지도 모른다는걸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이러한 생각들이 당연한것이 아니고, 2천년전에는 달랐다는 사실을 읽고나서는 묘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세계가 변하고 세월이 흐르면 변하는것이 생각들인데도 때로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것들이 전부라고 생각하게 된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는게 200년전까진 당연했고, 여자가 남자보다 하등하다는건 100년전까지도 당연했다는데 말이다. 지금은 이렇게 블로그에 포스팅 하는게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중하나지만 불과 50년 전만해도 이런 행동과 공간 모두가 전혀 상상할수 없던 것중에 하나였을텐데, 그런식으로 생각하다보니 재미있어졌다.

뭔가 정리가 아직 덜 되었지만.. 졸려서 자야겠다-_;;;;


우리의 하찮음과 약함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뻔하고, 너무 잘 알려져있고, 너무 지루해서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의 과제가 넓게보면 분명히 말이 안되는 것임에도, 확고한 결의와 진지함으로 그 과제에 다가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과장하고자 하는 충동은 지적인 오류이기는 커녕 사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생명력 자체라고 할수 있다.

우리자 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고 현재를 역사의 정점으로 보는 것, 코앞에 닥친 회의가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묘지의 교훈을 태만히 하는 것, 가끔씩만 책을 읽는 것, 마감의 압박을 느끼는 것, 동료를 물려고 하는 것, 회의일정을 꾸역꾸역 소화해 나아가는것, 부주의하고 탐욕스럽게 행동하다가 전투에서 산화해버리는 것- 어쩌면 이 모든것이 결국은 생활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현자들이 가르친대로 죽음에 대비하는것은 죽음을 지나치게 존중하는것이다. 참치 머리를 자르거나, 구역질 날 정도로 다양한 비스킷을 개발하거나, 들판에서 떡갈나무를 그리거나, 자동판매기를 발명하거나, 항공사를 위해 강도가 높아진 코일 튜브를 만드는 동안 죽음이 우리를 기습한들 어떠랴. 죽음의 물결에 대항아여 성냥개비로 바리게이트를 쌓고 있을때 우리를 발견한들 어떠랴.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 해줄것이다. 완벽에 대한 희망을 투자할수 있는 완벽한 거품은 제공해주었을것이다. 우리의 가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품위있는 피로를 안겨줄것이다. 식탁에 먹을것을 올려놓아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줄것이다.


이글루스 가든 - 천 권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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